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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와 재계···냉온탕 오간 영욕의 5년

YS와 재계···냉온탕 오간 영욕의 5년

등록 2015.11.23 16:37

수정 2015.11.23 16:38

정백현

  기자

문민정부 시절 당시 평균 GDP 실질 성장률 7.8%국내 다수 기업, 국내외서 신바람 내며 고속 성장재계와 얼굴 붉힌 적 많지만 서거에 한목소리 애도

사진=연합뉴스 제공사진=연합뉴스 제공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22일 향년 88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고인과 재계의 생전 연관 관계가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이 재임하던 문민정부 시기(1993년~1998년)는 서울올림픽 폐막 이후부터 시작된 한국경제의 최고 황금기 중 한 때로 꼽힌다.

특히 문민정부 5년 평균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7.8%에 이르렀고 임기 3년차였던 1995년에는 건국 이래 처음으로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달러를 넘기도 했다.

우리 기업들이 해외 시장을 향해 본격적으로 나래를 펼친 때도 문민정부 시절이다.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256메가 D램을 개발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일(1994년 8월)도 문민정부 시절이고 현대, LG, 대우, 선경(현 SK) 등이 세계 시장에서 보폭을 넓히기 시작한 것도 이때의 일이다.

나라 경제 전체가 초특급 고성장 상태를 유지한 덕분에 문민정부 당시 우리 기업들은 국내외에서 그야말로 ‘신바람 경영’을 실천했다.

오늘날 현역에서 활동하는 재계 총수들이 총수라는 타이틀을 달고 경영 전면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도 문민정부 시절이다. 1987년 12월 그룹 회장에 취임했던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신경영 선언’을 발표한 것은 문민정부 초기였던 1993년 6월이었다.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삼촌인 고 정세영 전 회장에 이어 제3대 현대그룹 회장으로 선임된 것도 문민정부 당시인 1996년이며 구본무 LG그룹 회장도 1995년 아버지 구자경 명예회장으로부터 그룹 경영권을 물려받고 회장직 재임을 시작했다.

그러나 기업인들 개개인의 면면에서 볼 때 문민정부와 재계는 조화로운 화음보다 파열음을 낸 적이 훨씬 더 많았다.

재계와 김 전 대통령 사이에 가장 안 좋은 추억은 1995년 말부터 1996년 초까지 진행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수사 때다. 문민정부는 두 전직 대통령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불법적으로 건넨 혐의로 여러 기업인들을 법정으로 불러 세우는 초강수를 뒀다.

이 당시 법정에는 이건희 회장과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 고 장진호 전 진로그룹 회장,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 등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대기업 총수들이 피고인 자격으로 줄줄이 출석했다. 기소된 기업인들은 모두 사법처리됐다.

일부 기업은 처참하다 싶을 정도로 정부로부터 혹독한 시련을 받기도 했다. 대표적인 곳이 고 아산 정주영 창업주가 이끌던 현대그룹이었다. 아산은 문민정부 출범 직후 불법 비자금 조성 등 여러 의혹에 대한 수사를 받았고 현대그룹에는 고강도 세무조사가 이어졌다.

당시 문민정부가 정권 내내 현대에 혹독한 시련을 내린 것에 대해 재계 일각에서는 정치 보복이라고 추측했다. 김 전 대통령이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 통일국민당 후보로 출마했던 ‘제3후보’ 아산을 밉게 봤고 이에 대한 보복성 수사를 단행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었다.

실제로 아산은 당시 남긴 자서전에서 “14대 대선 이후 자행된 김 전 대통령의 정치보복은 생각하기도 싫다”는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결국 아산과 김 전 대통령은 생전에 제대로 화해하지 못했고 아산이 2001년 3월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건희 회장과 김 전 대통령 사이에는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이 공존한다. 이 회장은 지난 1995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기업은 2류, 관료는 3류, 정치는 4류”라고 언급했다. 문민정부를 간접 비판한 이 발언 탓에 이 회장은 졸지에 해외를 떠도는 처지가 되기도 했다.

이 회장은 1996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에 연루돼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듬해 10월 개천절 특사를 통해 사면·복권 혜택을 받았다. 문민정부 들어서 기업인이 특별 사면·복권 혜택을 받은 것은 이 회장이 첫 사례였다. 이것이 이 회장과 문민정부 사이의 사실상 유일한 좋은 기억이다.

문민정부 최대의 과오로 치부되는 1997년 외환위기는 재계를 통째로 흔들었다. 한보, 기아, 해태, 삼미, 진로, 쌍방울, 한라, 뉴코아 등 30대 재벌 중 10여개 그룹이 이 당시 쓰러졌다. 이후 재계는 빅딜과 구조조정 등으로 생존을 위한 대수술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렇듯 재계는 문민정부 5년의 결코 길지 않은 시간동안 영광과 슬픔을 동시에 맛봤다. 그러나 민주화의 거목이자 현대사의 핵심 인물인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는 한목소리로 애도하며 그의 업적을 높이 기렸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부패 척결과 경제 투명 사회로의 전진을 앞당긴 분”이라고 평했고 대한상공회의소 역시 “하나회 척결과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 등의 업적을 남겼다”고 애도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도 “금융실명제 실시 등으로 경제 선진화에 앞장선 분”이라고 논평했다.

정백현 기자 andrew.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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