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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만 - 혁신은 사소한 의문에서 나온다

[창업자로부터 온 편지] 이원만 - 혁신은 사소한 의문에서 나온다

등록 2017.10.12 15:37

박정아

  기자

편집자주
‘창업자로부터 온 편지’는 한국 경제계의 거목으로 불리는 대기업 창업자들부터 미래를 짊어진 스타트업 CEO까지를 고루 조망합니다. 이들의 삶과 철학이 현직 기업인은 물론 창업을 준비하는 젊은 세대에게도 좋은 길잡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원만 - 혁신은 사소한 의문에서 나온다 기사의 사진

 이원만 - 혁신은 사소한 의문에서 나온다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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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만 - 혁신은 사소한 의문에서 나온다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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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만 - 혁신은 사소한 의문에서 나온다 기사의 사진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사업 성공의 핵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요. 우리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줄 아이디어는 거창한 발명이 아닌, 일상 속 사소한 의문에서 온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기업가가 있습니다.

바로 코오롱그룹의 이원만 선대회장입니다.

경북 영일군 출신으로 지역 산림조합에서 일하던 이 회장은 서른이 되던 1933년, 돌연 직장 생활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떠납니다. 마음 속 사업가의 꿈을 위해서였지요. 하지만 일제강점기라는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 채용을 꺼려했고 인간적인 대우도 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에서 신문배달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던 그가 어렵게 얻은 일자리는 작은 알루미늄 공장이었습니다.

당시 공장 직원들은 모두 ‘하찌마키’라는 머리띠를 두르고 작업을 했는데요. 머리에 하얗게 쇳가루가 내려앉은 것을 본 이 회장은 그때까지 누구도 제기하지 않았던 의문을 갖게 됩니다.

“일할 때 머리에 쇳가루가 쌓이지 않게 할 수 없을까?”

고민을 거듭하던 그는 챙이 달린 모자에 광고 문구를 새겨 작업용으로 제작합니다. 작업 모자에 변화를 가져온 이 아이디어는 대성공. 곧 점퍼, 작업복 등으로 품목을 확장하며 마침내 사업가로서 입지를 다지게 됩니다.

1954년 거미줄보다 가늘고 강철처럼 질긴 재질로 기적의 섬유라 불린 나일론을 수입했을 때도 마찬가지. 나일론을 누구보다 먼저 국내에 들여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평소 이 회장이 갖던 의문들이 있었지요.

“어떻게 하면 우리 동포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할까?”
“바느질, 다듬이질···부녀자들의 가사노동을 덜어줄 수는 없나?”

“왜 나일론을 수입에만 의존해야 하나?”

나아가 그는 국내에서 직접 나일론사를 뽑아내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 1957년 한국나이롱주식회사를 설립하고, 1963년 마침내 우리나라 최초로 나일론 제작에 성공합니다.

또한 농업과 공업의 갈림길에서 논쟁이 이어지던 1960년대. 많은 이들이 자원이 없는 나라에서는 농업이 적합하다 주장할 때, 이 회장은 ‘농공병진’(農工竝進)을 내세우며 공업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이 역시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그의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

“어째서 해보지도 않고 공업을 포기하려 하는가?”

한국을 수출국가로 만든다는 신념으로 노력을 거듭한 그는 1963년 서울 구로동에 수출산업공업단지를 조성하기에 이릅니다. 이어 구미 산업단지 조성을 반대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설득, 공단 설립도 이끌어냅니다.

이렇듯 이원만 회장은 남다른 생각과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섬유산업 및 섬유 수출 시대를 개척, 업계의 선구자 역할을 해왔는데요. 그의 아이디어가 우리 생활에 가져온 변화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당시 나무였던 전봇대가 시멘트로 바뀌고 가정 및 업소에 프로판가스가 도입된 것도 이 회장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됐습니다. 또 당시 수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던 가발 산업도 그의 머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모두가 당연하다 생각하는 것에 늘 의문을 가지고 그 해결법을 끈기 있게 찾아냈던 이 회장. 뒤늦게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누구보다 큰 성공을 이룰 수 있었던 힘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요?

아울러 그는 사업을 할 때는 국가와 국민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을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요. 사업이 부의 축적이라는 개인적 의미를 넘어 국민들의 삶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원만 회장의 경영철학, 사업의 꿈을 꾸는 이들이라면 한번쯤 되새겨봄직 합니다.

뉴스웨이 박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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