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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 회장을 기리며

[추모사]김우중 회장을 기리며

등록 2019.12.10 18:05

수정 2019.12.10 18:25

안민

  기자

나라도 춥고 회사도 춥던 1998년 1월, 국가부도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아 긴급 소집된 전경 련 회장단 회의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어두웠다. 회장단은 평소 격의 없이 지내는 사이였지 만 농담조차 선뜻 꺼내기 힘들 정도로 긴장이 팽배해 있었다. 그런데 김우중 회장이 말문 을 열었다. “다보스포럼 다녀오는 길에 몇 군데 둘러봤어요, 환율이 좋아져 돌멩이도 수출 이 될 것 같아요.” 500억 달러 국제수지 흑자론의 시발이었다.

당시 정부의 흑자 전망은 28억 달러, 그런데 그 해 한국경제는 416억 달러의 흑자를 시현했다. 하면 된다는 자신감 이 되살아났다. 희망이 보였다. 결국 정치가 망친 나라를 경제가 다시 일으켜 세웠다. 김우 중 회장은 나라를 구한 1등 공신이었다.

그는 일하고 또 일했다. 어느 날 아침 신문을 펼치니 리비아의 트리폴리에서 무슨 행사를 주재하는 사진이 실렸다. 오늘은 편하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조금 뒤 비서실에서 전화가 왔 다. “김우중 회장님이 11시에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자고 그러시네요.”, “아니 리비아 계시 던데?”, “행사 끝나고 바로 비행기 타셨대요.” 입이 벌어졌다.
토요일 오후 업무보고가 있었다. 오후 10시경 회의가 끝나 힐튼호텔 로비 바에서 마침 중 계되던 축구 경기를 보고 나왔다.

11시 반 경? 그런데 김 회장 수행비서가 로비에 서 있었 다. “회장님은요?”, “아직 사무실에서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알고 보니 오후 10시에 다른 회의가 또 시작돼서 곧 끝난다고 했다. “이래가지고 언제 쉬세요?” 하고 물었더니 “짬나는 시간이 쉬는 시간이야”하면서 또 일거리를 찾는 표정이었다. 그가 이렇게 일하고 또 일한 덕분에 우리는 초근목피를 먹던 시절에서 벗어나 세계 10대 경제 강국으로 도약했다.

몇 년 전 하노이에서 만나 가장 기억나는 곳이 어디냐고 물은 적이 있다. “아프리카의 붉 은 흙이 보고 싶어, 뜨거운 공기 맡으며.” 비록 은퇴했지만 그의 가슴에는 이글거리는 열정 이 있었다. 요새 젊은이들이 많이 약해졌다고 하자 “우리가 언제 젊은이들한테 기회라도 줘 봤냐고요.”라며 고개를 휘저었다. 눈빛이 빛났다.

그는 가슴속의 열정을 모아 젊은이를 위 한 기회를 만들었다. 남들이 말의 성찬을 벌이고 있을 때 그는 발로 뛰었다. 청년기업가 양 성 프로그램(GYBM)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렇게 밖으로 나간 한국의 젊은이가 천 명이 넘 는다. 그들은 김우중 회장의 희망대로 다음 세대를 위한 가교를 쌓을 것이다. 그들이 개척 한 경제 영토는 한국을 먹여 살리고 김우중 신화를 세계 곳곳에 재현해 낼 것이다.

김우중 회장 덕분에 나는 아침, 점심, 저녁을 각각 다른 나라에서 먹는 흔치 않은 경험을 했었다. 아침은 런던, 점심은 룩셈부르크, 저녁은 조금 늦게 루마니아에서. 그때는 그게 뭐 대수냐 싶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 시간을 통해 나는 세계를 봤고 미래 를 만났다. 김우중 회장 시대의 젊은이로 그와 같이 있었다는 것, 그와 같은 스승이 계셨다 는 것 하나로 나는 한없이 행복하다. 김우중 회장님의 영면을 빈다.

권오용(한국 가이드스타 상임이사,前 전경련 기획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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