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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의 테마 에세이|<바가바드기타>] ㉑ 제1권 38행-39행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우주의 어머니인 시간은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선택이란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한 마음가짐이자 행동가짐의 특별한 모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하루는 선택에 의해 과거의 일부가 되기도 하고, 혹은 새로운 창조를 위한 빅뱅이 되기도 한다. 그(녀)가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 그래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 그 하루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가 말한 것처럼, 인생에는 내가 조절 할 수 있는 일과 조절할 수 없는 일이 있다. 그가 조절할 수 있는 일을 구별하여 찾고, 그것에 최선을 경주한다면, 행운이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최선이 무시되고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가치들이 있다. 부, 권력, 그리고 명예다. 이것들은 우리가 조절할 수 없는 것들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이 세 가지가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선’이라고 교육받아왔다. 현대인들은 이것을 획득하기 위해, 동료를 배려하기 보다는 경쟁하고 짓밟는다. 불행한 사람은 타인과 경쟁하지만, 행복한 사람은 자신과 경쟁한다.

인간은 과거를 저버릴 수 없다. 과거가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 주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익숙하고 편한 과거를 기반으로 도약해야하지만, 대개의 경우, 그 과거에 안주하고 만다. 자신이 과거에 맺은 혈연, 지연, 그리고 학연이 그 사람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이 정체성을 과감하게 유기해야만, 새로운 세상이 비로소 열린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고대 근동의 떠돌이 상인이었던 아브라함은,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한 혈연과 지연과 결별한다. 자신의 양심의 소리에 복종하여 거룩한 여정을 시작하여 유일신 종교의 조상이 되었다. 그 내용이 <창세기> 12장 1절에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야훼신이 느닷없이 아브람에게 결단을 촉구하였다. 네가 이룰 미래의 너를 위해, 네가 오랫동안 거주했던 고향을 떠나라! 너를 보호하는 일가친척으로부터 너를 분리하여 떠나라! 무엇보다도 너의 아버지 집으로부터 탈출하라! 그래야, 너는 내가 앞으로 알려줄 그 땅으로 갈 수 있다.” 아브라함은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할 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꼭 고향, 일가친척,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떠나야합니까? 내가 이런 결별이 없어도, 당신이 지시하는 일들을 최선을 다해 경주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과거와 완전히 결별하여, 신앙의 조상이 되었다.

아르주나와 그의 오형제로 구성된 군대는 그의 일가친척인 카우바라 형제들로 구성된 군대와 대결하기 위해 ‘다르마크세트라’ 전쟁터에 자리를 잡았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심리적인 갈등에 관한 은유다. 아르주나는 그의 정체성이자 그의 일부인, 친족 카우바라 형제들과 전투를 감행하기를 주저한다. <바가바드기타> 1권 38-39행은, 아르주나가 그가 탄 전차를 끄는 크리슈나에게, 심리적인 주저를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바가바드기타> 제1권 38행-39행

yadyapyete na paśyanti
야드야프에테 나 파슈얀티
lobhopahata-cetasaḥ
로보파하타-체타사흐kula-kṣaya-kṛitaṁ doṣaṁ
쿨라-크샤야-크리탐 도샴
mitra-drohe cha pātakam
미트라-드로헤 차 파타캄

<바가바드기타> 제1권 39행
kathaṁ na jñeyam asmābhiḥ
카탐 나 즈네얌 아스마비흐
pāpād asmān nivartitum
피파트 아스만 니바르티툼kula-kṣaya-kṛitaṁ doṣaṁ
쿨라-크샤야-크리탐 도샴
prapaśyadbhir janārdana
프라파수야드비르 자나르다나

(직역)
“(38행) 만일 우리가 욕심에 의해 정복당해, 가족파괴를 감행해야하는 잘못과 친구들을 배신하는 범죄를 인식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39행) 우리가 가족파괴를 감행하는 잘못, 그 자체를 인식하여, 이 악으로부터 돌아갈 정도로, 왜 우리가 충분히 알고 있지 않습니까?”

(번역)
“만일 우리가 이기심과 욕심에 눈이 멀어, 우리가 대적하여 파괴해야할 대상이 가족과 친구라 할지라도, 우리는 인륜을 저버리는 자신의 가족을 말살하려는 잘못을 인식하고, 그런 극악무도한 일을 중단할 정도로, 우리가 이성적이지 않습니까?”


위 원문에서 등장하는 ‘가족’이란 의미를 지닌 산스크리트 단어 ‘쿨라’kula는 정신적으로 요가수련자를 유혹하는 과거의 습관이며 중독이다. 아르주나는 요가수련이라는 전쟁터에서 자신의 일부를 제거해야하는 자기부인의 훈련을 감수해야한다. 마찬가지로 요가수련자가 우주와 자연과 합일하는 자신, 즉 해탈된 자신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과거와 결별해야한다.

요가수련자는 해탈된 자신을 아직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의 자신을 여전히 간직하려한다. 그는 자신의 동물적이며 감각적이며 습관들을 버리지 못한다. 수련자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왜 내가 물질적이며 육체적인 쾌락과 영적인 해탈을 함께 즐길 수 없는가?” 매일 명상을 수련하고 요가운동을 훈련을 통해 평정심을 맛본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음 속 깊이 숨어있는 순간의 쾌락을 갈구하는 습관이 수련자를 호심탐탐 유혹하기 위해 기다린다.

예수도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린 후에, 자신의 제자가 되기 위한 두 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자기부인’이며, 다른 하나는 ‘자신만의 십자가를 지고 의연하게 정진하는 것’이다. 자기부인이란, 자신을 중독시키는 과거와의 결연한 단절이며, 십자가란,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담보할 수 있는 가치를 찾아 오늘을 사는 것이다. 나는 과거와 단절할 수 있는가? 나는 자신을 부인할 수 있는가? 나는 나의 정성을 쏟아 부울 수 있는 궁극의 임무를 깨달아, 지금-여기에서 실천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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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에 선 젊은이, 프랑스 화가 귀스타브 카유보트 (1848-1894) 유화, 1875, 117 cm x 82 cm 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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